하이 눈
하이 눈(High Noon)
최용현(수필가)
미국 뉴멕시코 주의 해들리 마을, 보안관 임기가 끝난 윌 케인(게리 쿠퍼 扮)은 10시 35분에 시작된 아름다운 신부 에이미 폴러(그레이스 켈리 扮)와의 결혼식이 끝나자, 보안관 배지를 반납하고 새 보금자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때, 살인범 프랭크 밀러가 교도소에서 나와 기차를 탔고, 정오에 이 마을에 도착한다는 전보가 전달된다. 그는 5년 전에 케인에게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감형되어 석방된 모양이다. 그가 잡혀갈 때 ‘꼭 돌아와서 복수하겠다.’고 케인에게 말했었다. 그의 부하 3명은 벌써 마을 어귀에 있는 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소식을 들은 결혼식 하객들은 ‘보안관 임기가 끝났으니 신부를 생각해서라도 얼른 이곳을 떠나라.’고 말한다. 에이미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던 케인은 후임 보안관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차를 돌려 마을로 돌아온다. 에이미는 굳이 악당들과 싸우겠다면 자신은 혼자서라도 떠나겠다며 역에 가서 기차표를 산다.
보안관의 조수는 자신을 정식 보안관으로 승진시켜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사표를 냈고, 밀러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판사도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났다. 케인은 악당들과 싸울 사람을 찾기 위해 여러 집을 방문하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교회에서도 케인더러 빨리 이곳을 떠나라는 말뿐이다. 결국 케인 혼자뿐이다.
정오가 되어 기차가 도착하자, 두목 밀러를 포함한 네 명의 악당이 총을 들고 마을에 들어온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거리에서 4대 1의 시가전(市街戰)이 시작되고 총소리가 울리자, 기차를 탔던 에이미는 차에서 내려 마을로 달려와 보안관 사무실에 들어간다. 악당 둘을 처치한 케인이 어느 집 헛간으로 숨어들자 악당들은 헛간에 불을 지르는데….
에이미는 어릴 때 아버지와 오빠가 흉악범들의 총에 희생되었기 때문에 폭력에 반대하는 퀘이커교도가 되었지만, 악당 한 명이 바로 앞 창가에 등을 보이자 보안관 사무실에 있는 총으로 쏘아 죽인다. 혼자 남은 두목 밀러는 에이미를 인질로 잡고 밖으로 나와 케인에게 총을 버리고 나오라고 소리친다. 밖으로 나온 케인은 에이미가 밀러를 뿌리치는 사이 총을 쏘아 밀러를 해치운다.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거리로 몰려나와 환호를 한다. 케인은 마을사람들을 힐끗 둘러보면서 보안관 배지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에이미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난다.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흘러나오던 주제곡 ‘나를 버리지 말아줘요, 내 사랑(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이 엔딩 크레디트에서도 흘러나오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하이 눈(High Noon)’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1952년에 만든 흑백영화로, 그해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 음악상, 주제가상, 편집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군더더기 없는 각본과 편집, 출연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등으로 ‘서부영화의 3대걸작’의 하나로 꼽히며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눈(noon)은 낮 12시 전후, 하이 눈(high noon)은 정오, 즉 정각 12시를 의미한다. 영화는 오전 10시 35분에 시작하여 정오가 약간 지나서 끝나는데, 그 1시간 27분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1시간 27분의 러닝 타임으로 보여준다. 틈틈이 정오에 다가가는 시계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초조감과 긴장감을 자극한다.
이 영화는 미국의 건국 영웅으로 추앙받는 서부극 주인공에 대한 신화화(神話化)에서 과감히 탈피했고, 한번 총을 뺐다 하면 한꺼번에 몇 명씩 쓰러뜨리는 마카로니웨스턴의 과장된 영웅주의도 확연히 버렸다. 그 대신 그리 특출하지 않은 주인공과 각 등장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 리얼리즘 연출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가장 좋아했던 영화 1위는 ‘하이 눈’ 2위는 ‘카사블랑카’ 3위는 ‘콰이강의 다리’로 밝혀졌다. 아이젠하워는 3번, 빌 클린턴은 무려 20번이나 ‘하이 눈’을 보았다고 한다. 레이건은 이 영화를 애국심이 투철한 보안관이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평설했는데, 그는 영화배우협회장 시절 당시의 매카시즘(McCarthyism) 열풍에 힘입어 공산주의자 척결에 앞장서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들이 이 영화를 좋아한 것은 능히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악당들에 맞서는 전직 보안관의 투철한 사명감을 높이 평가하고, 대통령인 자신도 그래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케인은 악당들과의 대결에 앞서 유서를 쓰는 결연함을 보이는데, 이런 고뇌에 찬 보안관의 심사(心思)를 뛰어난 내면연기로 소화해낸 게리 쿠퍼는 두 번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보안관 윌 케인 역은 처음에 그레고리 펙에게 제의했다가 거절당하여 게리 쿠퍼에게 넘어갔는데, 후일 그레고리 펙은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케인 역을 거절한 것이라고 했다. 23세 그레이스 켈리의 남편으로는 51세의 게리 쿠퍼보다는 36세의 그레고리 펙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우아한 금발미녀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은 후 ‘모감보’(1953년), ‘다이얼 M을 돌려라’(1954년), ‘이창’(195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갈채’(1954년) 등에서 열연하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1956년 모나코 왕자와 결혼하면서 은퇴했고 1982년 자동차 사고로 53세에 세상을 떠났다.
보안관의 조수로 나오는 로이드 브리지스는 중견배우 보 브리지스와 제프 브리지스 형제의 아버지이다. 또, 후일 마카로니웨스턴의 간판배우가 되는 리 반 클리프는 자신의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밀러의 부하로 나오는데, 영화의 첫 화면에서 독사진으로 나오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지만, 대사 한 마디 없이 폼만 잡다가 게리 쿠퍼의 총에 맞아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