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세이

영자의 전성시대

월산처사, 따오기 2019. 6. 20. 09:03

영자의 전성시대

 

최용현(수필가)

 

   1975년 1월말, 나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하여 그해 3월에는 서울 서오릉 인근에 있는 보안부대에서 4주 기간의 후반기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 구대장인 준위가 요즘 장안의 화제는 ‘영자의 전성시대’라며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해주었다. 정작 내가 그 영화를 본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후였다.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개봉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때 개그우먼 이영자가 진행하던 개그코너의 이름도 ‘영자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던가.

   작가 조선작은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 낙방했는데, 1971년 ‘세대’라는 잡지에서 신춘문예 낙선작품을 공모하자, ‘지사총(志士塚)’을 보내 당선한다. ‘지사총’은 6.25동란 때의 합동묘지를 일컫는 것으로 창수의 입대 전 철공소 시절의 이야기이고, ‘영자의 전성시대’(1973년)는 창수의 제대 후 때밀이 시절의 이야기이다. 두 작품은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다.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던 창수(송재호 扮)는 종종 사장 집에 심부름을 가는데, 이때 사장 집 식모 영자(염복순 扮)를 만나게 된다. 한눈에 반한 창수는 영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영자는 ‘난 서울에 연애하러 온 게 아니에요.’ 하면서 외면한다. 그러다가 창수는 영장을 받고 입대한다.

   월남으로 파병된 창수는 영자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며 순정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영자는 주인집의 망나니 아들에게 겁탈 당한다. 영자는 자신의 순결을 빼앗은 그 망나니와 결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관계를 지속하다가 그의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그 집에서 쫓겨난다.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영자는 봉제공장에 취직하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에 실망한다. 이번에는 돈을 많이 번다는 술집 호스티스를 해보지만 하루 만에 그만둔다. 다시 버스안내양이 되어 만원버스에서 시달리던 영자는 급정거하는 버스에서 떨어져 왼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다. 보상금으로 30만원이 나오자, 영자는 그 돈을 시골의 홀어머니에게 보낸다.

   이제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된 영자는 절망에 빠져 자살을 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일어선다. 돈도 없고, 마음도 피폐해진 영자는 가끔 자러가던 여인숙에서 남자에게 몸을 팔게 되고, 그렇게 창녀생활을 시작한다. 팔이 하나 없는 영자는 손님들의 구박을 받기도 하지만 악착같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군에서 제대한 창수는 부랑자들과의 시비로 경찰서에 가게 되는데, 경찰은 창수가 월남전 참전용사임을 감안하여 방면한다. 이때 창수는 매춘으로 잡혀와 유치장에 갇힌 영자를 보게 된다. 목욕탕 때밀이 창수와 창녀가 된 영자는 3년여 만에 그렇게 조우한다. 영업이 끝난 목욕탕에서 창수가 한 팔이 없는 영자의 때를 밀어줄 때 창수의 진심을 느낀 영자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영자를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 창수는 성병에 걸리자, 자신부터 치료하고 다시 영자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한다. 창수는 치료기간인 2주 동안 손님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매일 돈을 들고 영자를 찾아간다. 또 비싼 의수(義手)를 살 수 없는 영자에게 나무를 깎아 멋진 팔도 만들어 준다. 그 의수 덕분에 영자는 손님을 많이 받아 바야흐로 ‘영자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어느 날, 창수는 손님과 시비가 붙은 영자를 도와주다가 감방에 가게 된다. 영자가 감방으로 면회를 오자, 창수는 출소하면 방을 얻어 같이 살자고 하는데, 영자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머뭇거린다. 창수는 출소하자마자 영자를 찾아가지만 사창가 단속 때 사라진 영자는 어디로 갔는지….

   세월이 흘러 창수는 늘 꿈꾸던 세탁소의 주인이 된다. 어느 날 창수는 친구로부터 영자가 어느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판자촌을 찾아간 창수는 거기서 다리에 장애가 있는 남편과 아이까지 낳아 살고 있는 영자를 보게 된다. 영자가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창수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이 오직 몸뚱이 하나만으로 팍팍한 현실과 맞닥뜨리는 젊은 남녀의 처절한 삶의 이야기로, 1970년대 산업화 시대의 어두운 그늘을 독특한 시선으로 조명한 영화이다. 사창가의 창녀와 목욕탕의 때밀이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 아닌가.

   영자는 70년대에 무작정 상경한 여성들의 삶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상징적인 캐릭터이다.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여성들은 봉제공장의 여공이나 버스 안내양, 그도 아니면 부잣집의 식모나 술집 호스티스가 되었다. 반면에 그런 영자를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창수는 실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필요에 의해 창조된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의 결말은 소설과 영화가 확연히 다르다. 원작소설에서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 영자가 사는 창녀촌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창수가 현장으로 달려가 한쪽 팔이 없는 주검 한 구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만약 소설대로 영화가 끝난다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영자의 가혹한 운명에 좌절할 것인가. 영자에게 새 삶을 선사한 영화의 해피엔드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에서 창수 역을 맡은 남자주인공 송재호, 여인숙 주인과 악덕 포주로 나오는 박주아와 도금봉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창수의 멘토 역할을 하는 보일러공 최불암, 영자의 장애인 남편으로 나오는 이순재는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이유를 살짝 닮은 것 같은 여주인공 염복순은 지금 어디에서 늙어가고 있는지….